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해왕성의 발견과 역사

by blueoceanforest 2024. 6. 19.
반응형

해왕성 연구의 역사


발견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관측 그림에 따르면 그는 1612년 12월 28일과 1613년 1월 27일에 해왕성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갈릴레오는 목성 옆에 있던 해왕성을 붙박이별로 착각했으므로, 해왕성을 행성으로서 발견한 사람은 아닙니다. 1612년 12월의 첫 관측 당시 해왕성은 막 역행 운동으로 돌아선 때였기 때문에 겉보기상으로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해왕성이 역행 주기를 시작했을 때엔 움직임이 너무 미약해서 갈릴레오의 부실한 망원경으로는 감지하기에 무리였을 것입니다. 한편 멜버른 대학교의 천문학자 데이비드 제이미슨은 2009년 7월에, 갈릴레오가 자신이 발견한 별이 다른 붙박이별들과 달리 움직였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1821년에 알레시 부봐르가 해왕성의 이웃 행성, 천왕성의 궤도에 대한 천문표를 출판했습니다. 그런데 이후의 관측에서 천문표와 어긋나는 결과가 상당량 발견되었으며, 부봐르는 미지의 물체가 중력적 상호 작용을 통해 천왕성의 궤도에 섭동을 일으킨다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1843년에는 존 쿠치 애덤스가 천왕성의 운동에 영향을 미치는, 가상의 여덟 번째 행성의 궤도를 계산했습니다. 애덤스는 자신의 계산 결과를 왕실천문관 조지 에어리 경에게 보냈는데, 에어리는 애덤스에게 해명을 더 요구했습니다. 애덤스는 답신의 초고를 쓰기 시작했지만 보내지는 않았으며, 이후 천왕성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루지 않았습니다.

애덤스와는 별도로 1845년과 1846년에는 위르뱅 르베리에가 독자적으로 계산을 수행했지만, 역시 동료들에게서 큰 반응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6월이 되어 르베리에가 행성의 황경에 대한 계산을 출판했고, 그것을 본 에어리는 애덤스의 계산과 유사점을 발견했습니다. 에어리는 행성을 찾아보자고 케임브리지 천문대장 제임스 챌리스를 설득했다. 하지만 챌리스가 8월과 9월 내내 하늘을 훑고 다녔는데도 별 소득이 없었습니다.

 

위르뱅 르베리에



그 사이 르베리에는 서한으로 베를린 천문대의 천문학자 요한 고트프리트 갈레를 재촉했습니다. 당시 베를린 천문대 연구생이었던 하인리히 다레스트는 르베리에가 예측한 지점 근처를 그린 최근의 성도와 현재 하늘을 비교해서 붙박이별과 구별되는 행성의 시운동적 특징을 찾을 수 있다고 갈레에게 건의했습니다. 르베리에의 편지가 도착한 1846년 9월 23일 바로 그날 저녁, 해왕성은 르베리에가 예측한 지점에서 1° 어긋난 지점, 애덤스가 예측한 지점에서 12° 어긋난 지점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후 챌리스는 자기가 8월에 행성을 두 번이나 봤지만 무심결에 지나쳐 버렸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자기 발견을 증명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행성이 발견되자, 누가 먼저 발견했느냐, 누구에게 공로를 돌리느냐를 두고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민족주의적 경쟁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르베리에와 애덤스 둘 다에게 공로가 있다는 국제적 총의가 형성되었습니다. 하지만 1998년에 미국의 천문학자 올린 에겐이 훔쳐 칠레로 도망갔던, 〈해왕성 문서〉("Neptune papers"; 왕립 그리니치 천문대의 역사적 문서)가 재발견되면서 역사가들이 이 문제를 다시 다루게 됩니다. 문서를 검토한 뒤, 일부 역사가들은 애덤스는 르베리에와 동등하게 대접받을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데니스 롤린스는 1966년부터 애덤스가 공동발견의 권리를 주장할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져 왔습니다. 1992년, 저널 《디오》(Dio)에서 롤린스는 영국이 공로를 "훔쳐갔다"라고 간주했습니다. "애덤스가 계산을 좀 하긴 했지만, 그는 해왕성이 정확히 어디 있는지의 문제에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행성 도난 사건: 영국인들이 해왕성을 훔쳤다!〉논문을 쓴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니콜라스 콜러스트롬의 말입니다.

 


명명
해왕성이 발견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해왕성을 그냥 "천왕성 바깥 행성"이나 "르베리에의 행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처음으로 이름을 제안한 사람은 갈레였는데, 그는 ‘야누스’('Janus')라는 이름을 제안했습니다. 한편, 잉글랜드에서는 챌리스가 ‘오케아노스’(Oceanus)라는 이름을 제출했습니다.

르베리에는 재빨리 자기 발견물을 자기가 명명할 권리를 내세우며 ‘넵튠’(Neptune)이라는 이름이 프랑스 경도국에서 인증받은 이름이라고 거짓 주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10월이 되자 그는 행성을 자기 이름을 따서 ‘르베리에’(Le Verrier)라고 명명하려고 했으며, 천문대장 프랑수아 아라고의 지지까지 확보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이 시도는 프랑스 외부에서 강한 반발에 부딪혔습니다. 프랑스의 책력들은 급히 천왕성을 그 발견자 허셜 경의 이름을 따 ‘허셜’(Herschel)이라고 표기하기 시작했으며, 새로 발견된 행성도 덩달아 ‘르베리에’라고 표기했습니다. 1846년 12월 29일에 스트루베가 상트 페테르부르크 과학 아카데미에서 ‘넵튠’을 지지한다고 밝혔고, 곧 ‘넵튠’이라는 이름이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로마 신화에서 넵투누스는 바다의 신으로, 그리스 신화의 포세이돈에 대응되는 신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언어들은 이 행성을 ‘넵튠’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그리스 로마 신화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나라들도 ‘넵튠’이 변형된 이름을 사용합니다. 예외는 한자 문화권으로, 일본어, 중국어, 한국어, 베트남어는 바다의 신인 넵투누스의 역할을 의역하여 바다의 왕이라는 뜻에서 ‘해왕성’(海王星)이라고 부릅니다.

현재
1840년대에 발견되고부터 1930년대까지 해왕성은 태양계 최외곽 행성이었습니다. 1930년에 명왕성이 발견됨으로써 해왕성은, 1979년부터 1999년까지 명왕성이 해왕성 궤도 안으로 들어오는 20년 주기를 제외하고는 뒤에서 두 번째 행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1992년에 카이퍼 대가 발견되자 많은 천문학자들은 명왕성이 행성인지 카이퍼 대의 큰 천체에 불과한지에 대해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2006년, 국제천문연맹은 마침내 "행성"이라는 말의 의미를 최초로 정의했으며, 명왕성은 "왜행성"으로 재분류되었습니다. 고로 해왕성은 다시 태양계 최외곽 행성이 되었습니다.

반응형